헤어질 결심은 박찬욱 감독이 공식 개봉 전부터 칸 국제 영화제 감독상을 안겨 준 빼어난 작품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박찬욱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사랑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미래에 이보다 더 좋아하는 영화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그렇습니다. 박 감독의 지난 작품들과는 다른 결로 섬세하고 강렬한 감정선을 담아내는 데 성공하면서 단순히 스릴러나 미스터리 장르로 정의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매력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헤어질 결심은 어떤 영화인가요?
- 감독 : 박찬욱.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대한민국 대표 거장)
- 장르 : 스릴러, 로맨스, 미스터리.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독특한 조합)
- 개봉 : 2022년 6월 29일 (대한민국 기준)
- 주연 : 탕웨이(송서래 역), 박해일(장해준 역)
- 수상 : 제 75회 칸 국제 영화제 감독상, 제43회 청룡영화상 최우수 작품상 외 10개 부문 수상.
헤어질 결심은 어떤 이야기일까요?
아내와 아들이 있는 형사 장해준은 변사 사건 현장에서 사망자의 아내인 송서래를 만나게 됩니다. 서래는 남편의 죽음 앞에서도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아서 해준은 그녀에게 강한 의심을 갖지만 동시에 묘하게 그녀를 향해 마음이 끌립니다. 그 후 해준은 용의자 수사라는 명분으로 잠복과 미행을 통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면서 점차 서래에게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 하지만 서래는 이때까지도 형사인 해준이 자신에게 느끼는 호감을 적극 이용하려는 모습입니다. 뭐, 동시에 그녀 역시도 해준에게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 것 같고요. 이들은 수사와 감시라는 기묘한 관계 속에서 서로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금지된 감정의 교류를 시작합니다. 해준은 불면에 시달리는 서래에게 자신의 수면제를 주고, 함께 식사를 하며 서로의 세계에 점점 침투해 갑니다. 처음에는 특유의 침착함으로 자신을 방어하던 서래도 해준 앞에서 조금씩 무장해제되고 해준 역시 자신의 의무와 서래에 대한 마음 사이에서 격렬하게 갈등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서래의 과거와 함께 사건의 진실은 드러나고 해준은 서래에게 '그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이 빠뜨려서 아무도 못 보게 해요'라며 관계의 끝을 선언하게 되고 맙니다. 몇 년 후, 해준은 이포로 발령받아 내려가고 서래 역시 재혼한 남편과 함께 이포로 내려가서 우연히(저는 우연히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와 마주칩니다. 둘은 재회한 후에 더욱 복잡한 파국으로 치닫고 맙니다. 해준은 서래를 사랑하는 마음과 자신에게 드리워진 과거의 그림자 속에서 끊임없이 '헤어질 결심'을 반복하고, 서래 역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처럼 해준에게 매달리게 되죠. 마지막 장면은 영화를 본 모든 이들에게 깊은 여운과 슬픔 그리고 충격을 남기며 이 작품이 단순한 로맨스가 아님을 다시 한번 각인시켜 줍니다.
헤어질 결심 : 어떤 점이 특별할까요?
헤어질 결심은 수많은 국내외 평론가들에게 극찬을 받았으며, 그 핵심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소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1. 박찬욱 감독의 절제되면서 밀도 높은 시각적인 연출 미학
박 감독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미장센이 정말 너무나 돋보인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저 또한 10000% 동의합니다. 예전에 보여주었던 폭력적이고 강렬한 이미지보다는 훨씬 절제되었지만, 그만큼 감정과 서사를 농축해서 전달하는 연출 기법에 감탄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시점숏을 활용하여 인물들의 시선과 심리를 긴밀하게 연결하고, 특히 해준이 서래를 훔쳐보는 장면 등은 관객들이 마치 인물의 내면에 들어간 듯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높이와 깊이의 활용도 탁월합니다. 산, 절벽, 바다 등 수직적 공간의 활용과 시네마스코프 화면비를 통해 인물들의 고립감과 심리적 깊이를 효과적으로 드러냈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게다가 산과 바다라는 대비되는 공간은 서래와 해준의 관계, 그리고 그들의 복잡한 심리를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장치로 활용되었습니다. 마지막 한 가지는 스마트폰, 녹음기, 번역 앱, CCTV 등 전자기기 화면이 이야기를 진전시키는 중요한 도구이자 인물들의 심리를 파고드는 매개체로 사용된 점도 높은 평가를 받았어요.
2. 모호하고 복합적인 '사랑'의 새로운 정의
- 의심과 매혹 : 용의자와 형사라는 대척점에서 시작된 관계가 의심에서 매혹으로 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사랑으로 변모하는 과정이 관객들에게 묘한 긴장감과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 파국적 로맨스 : '붕괴 이후의 사랑'이라는 평처럼 행복한 결말보다는 비극적이고 파멸적인 사랑의 형태를 보여주면서도 그 안에 숭고한 아름다움을 담아냈다는 점이 특히 주목할 만 합니다.
-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 각자의 의무와 도리, 그리고 어긋나는 감정들 속에서 피어난 사랑이 결국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인지하면서도 서로에게 강하게 이끌리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솔직하게 담아냈다고 평가받고 있어요.
3. 탕웨이와 박해일, 두 배우의 완벽한 감정선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력이 영화의 깊이를 더했다는 극찬이 끊이지 않는 작품입니다. 탕웨이는 예측 불가능하고 미스터리한 서래 캐릭터를 통해 '몸이 꼿꼿한 서래 씨'라는 명대사가 탄생할 만큼 관객들의 뇌리에 깊이 박혔습니다. 우리말이 서툰 설정과 그로 인한 미묘한 어감 차이가 오히려 캐릭터의 입체감을 더하고, 감정을 숨기는 듯 드러내는 듯한 절제된 연기로 극의 몰입도를 높였다는 평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박해일은 자신의 삶에 완벽하게 몰입하던 형사가 서래를 만나 점차 무너져가는 과정을 탁월하게 연기하며, '이토록 단단하고 단일한 그가 부서져 내리는 순간은 어떤 감동이나 쾌감을 넘어선다'는 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왜 '헤어질 결심'을 봐야 할까요?
- 영화적 경험의 확장 : 단순히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을 넘어, 영화가 선사하는 미학적이고 심리적인 경험 자체에 몰입할 수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 특유의 디테일과 상징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처음 서래가 경찰서 조사실에서 심문을 받을 때, 점심 메뉴로 비싼 초밥을 시켜주던 해준은 이포로 내려간 후 다시 용의자로 재회한 서래한테 누가 봐도 저렴해 보이는 핫도그 하나를 점심으로 내줍니다. 비싼 초밥을 사 먹일 때는 조그마한 물고기 모양의 간장 병도 주목해봐야 합니다. 너무 잠깐 클로즈업된 채 지나가버려 많은 관객들이 기억조차 못하지만, 분명 그 간장 병은 조사실에서의 해준의 심리 상태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훌륭한 미장센입니다. 해준의 간장 병은 텅 비어있지만, 서래의 간장 병은 거의 그대로 있습니다. 이것은 서래한테 온 정신이 팔려서 그녀한테는 간장을 듬뿍 짜주지만 자신의 간장 병은 아예 짜야한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빨리 뛰기 위해 운동화만 신고 다니던 그가 이포에서는 왜 구두만 신고 다니는지, 죽은 새를 양동이로 흙을 파서 땅에 묻어주는 모습 등등 너무나 많습니다.
- 인간 본연의 감정 탐구 : 사랑, 의심, 욕망, 죄책감, 책임감 등 복합적인 인간의 감정들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데 성공한 작품입니다. 인간 심리에 대한 깊은 통찰을 얻을 수 있어요. 저 개인적으로는 남녀 관계적인 욕망을 미장센으로 아름답게 그려내는 박 감독의 연출에 감탄을 했습니다. 전에는 직설적, 직관적으로 보여주던 그의 연출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미장센으로 유려하게 처리하는 것으로 바뀌는 걸 보니, 그도 나이가 들어서일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너무나 사랑하는 송광사 데이트 장면에서 서로 주거니 받거니 북을 치는 장면이 있는데 어떻게 저런 아이디어를 생각해 낼 수 있는지 완전 박찬욱 감독한테 다시 한번 반했습니다.
- 깊은 여운과 토론의 여지 : 영화가 끝난 후에도 캐릭터들의 감정과 결말의 의미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과 감상을 나누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습니다. 박 감독과 오랜 친구인 조영욱 음악 감독이 프로듀싱하고 이명로 작곡가가 작곡한 음악도 깊은 여운을 남게 하는데 아주 큰 역할을 합니다.
결론
저는 KBS와 MBC에서 방영했던 주말의 명화와 토요명화를 보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저의 영화적 취향과 감성은 고전에 가깝습니다. 물론 요즘 영화도 좋은 작품이라면 좋아합니다. '헤어질 결심'은 제게 주말의 명화나 토요명화 같은 고전적인 느낌을 주는 훌륭한 작품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비교한다면 비비언 리의 영화 '애수(Waterloo Bridge)'와 비슷한 감성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저만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더라고요. 이 영화를 N차 관람했던 관객들의 인터뷰를 유튜브에서 본 적이 있는데 다들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전개가 지루하거나 하진 않습니다. 로맨스를 다루는 영화치고는 긴 러닝타임이지만 지루하다는 느낌은 없습니다. 미스터리와 아이러니 기법을 효과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지루함을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그럼에도 지루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뭐, 저도 어쩔 수는 없습니다. 아무튼 저 역시 이 작품을 N차 관람했던 사람으로서 비비언 리의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조심스럽게 추천합니다. 어쨌든 지금은 박찬욱 감독 작품 중에서는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영화임에는 틀림없습니다. 9월 24일에 '어쩔 수가 없다'가 드디어 개봉합니다. 부디 헤어질 결심을 뛰어넘는 영화이기를 바랍니다.